Topic /1
NPC이름
레이티스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전 레이티스라고 해요. 구해준 건 고맙지만... 에아몬이... 제가 아는 모든 것이... 사라졌어요. 별로 값어치가 있진 않지만,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그 괴물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기억의 책 Text Audio /16
이름
나는 테오폴리스에 위치한 오리아스 학회의 기록관이자, 고위 템플러 베나리우스의 심복인 발도 캐사리우스라고 한다.

당금에 닥친 공포에 대해서 기록하다 보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기록을 남긴다. 얼마 전, 나는 수리를 부탁한다면서 기묘한 장치를 넘겨받았다. 레이클라스트의 폐허에서 발견된 순금으로 만들어진 장치였다. 어두침침한 비밀을 간직한 물건처럼 보였지만, 고위 템플러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장치를 복원하여 무기화하는 데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의뢰를 받을 당시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장치를 수리하는 몇 주 동안 다섯 살 난 딸아이가 악몽을 꾸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 때는 딸아이도 엄마를 잃었으니 힘든 시간을 겪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징후였다.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명령을 거부하는 방안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래봤자 결국은 신념을 꺾고 악의와 탐욕으로 가득한 그의 지시를 따랐지만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위 템플러와 대치했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자들이 없다는 사실을.
1장
해체된 장치가 작업대 위에 올려져 있다. 부끄럽게도 이 장치의 존재 목적에 관하여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조그마한 조각들에만 신경을 썼을 뿐, 하나로 완성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공포가 날 덮치는 그 순간까지 어떤 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을 따름이다.

어떤 유물인지는 몰라도 다시 작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상당 부분을 복원해냈지만,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부품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부품 말이다. 장치를 작동하는 데 필요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부품의 생김새를 섣부르게나마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잠에서 막 깨어나 아직 꿈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유하다 보니, 이제껏 해본 적 없는 일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 장치의 밑둥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장
참으로 아름다운 곳에서 잠이 깼다. 오리아스의 잿빛 하늘과는 다르게, 그저 푸른 하늘이었다. 새들은 아름답게 지저귀며 창공에서 날개를 푸득였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어루만졌고, 기다란 잔디가 장난스럽게 내 몸뚱이를 간지럽혔다.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문득 작업대에 자리 잡은 채로 작동하지 않는 그 장치가 이 세계와 관련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혼자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길다란 잔디가 자라난 들판을 돌아다니며 수풀 속에서 평화를 만끽하다가 또 다른 방랑자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쉐이드였다. 형체를 갖춘 연기가 무어라 속삭였지만, 주변의 초목 때문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킨 쉐이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그것이 말하려는 생각과 심상, 색조, 감정이 갈라진 틈새에서 튀어나오는 물줄기처럼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쉐이드는 자신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며 어쩌다가 이곳까지 왔냐고 물었다. 어떻게든 대답을 하고 싶던 나는 오리아스나 딸아이, 날 여기로 끌어들인 매개체로 추정되는 기묘한 장치에 대한 정보까지 자진해서 털어놓기에 이르렀다.
3장
깊은 생각에 잠긴 쉐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쉐이드는 장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쉐이드는 그 장치가 현실과 꿈을 오가는 통로였지만, 악당과 도둑의 손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고 했다. 장치를 다시 찾게 되어서 기쁘다며 사라진 마지막 부품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도 말했다.

실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만들어 이 땅의 좋은 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리아스에 새로운 황금기가 찾아오리란 생각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위 템플러 베나리우스의 치세에서 살아갈 딸아이의 미래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쉐이드는 언젠가 때가 되면 호의에 보답해달라는 얘기만 했다.

서늘한 풀밭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쬐며 누워 있던 나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꿈의 세계에서 벗어나 차갑고 텅 빈 어둠이 내려앉은 연구실에서 깨어났다.
4장
몇 주가 지났다. 해가 지고, 달이 뜨기를 반복했다. 나는 밤마다 기묘한 장치의 밑둥에서 잠이 들어 또 다른 세계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꿈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다.

잠에 빠져든 동안, 나는 이 기묘한 세상의 방식을 배우려 쉐이드의 제자를 자처했다. 그렇게 상상했던 무언가를 형상화하고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웠고, 이내 마치 마석학의 극의에 달한 것처럼 허공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던 나는 쉐이드의 지시에 따라 사라진 부품을 다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토록 변화무쌍한 보물을 현실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다니, 참으로 흥분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오리아스에서 고위 템플러 베나리우스와 만날 때에는, 거짓말을 섞어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주제넘게도 내가 찾아낸 힘에 대해서 밝히기가 싫었다. 꿈의 세계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에게도 밝힐 수 없는 그런 비밀 말이다.
5장
마침내 이 위대한 장치의 사라진 부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고대부터 전해지는 지도의 신비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는 기이한 형태의 부품이었다. 바로 그 순간, 쉐이드가 전에 베풀었던 호의에 보답해 달라고 청했다.

갑자기 왕의 신분으로 꿈의 세계를 통치하던 쉐이드의 과거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름답고도 고귀한 왕국에 드리웠던 그림자 역시 눈에 들어왔다.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종자들이 만들어낸 부패의 감시자라는 종파가 쉐이드를 파멸시키려고 들었다. 꿈의 세계를 지배하는 데 눈이 멀었던 그들은 왕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 있는 강력한 칼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육체를 돌처럼 굳어가게 만들어, 영혼이 자신이 다스렸던 땅을 떠돌게 만드는 저주를 내렸다.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이토록 겸손한 존재에게 어찌 그런 시련을 내린단 말인가? 그 악당들은 지금 어딨지? 장치를 훔쳐서 달아났던 이들이 바로 그 악당들이었나? 두 개의 세상을 이어주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장치를 망가뜨린 범인도 그들이었던가?

쉐이드는 날 어둠으로 뒤덮인 숲의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잊혀진 동굴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조각상은 환상 속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검에 꿰뚫려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형상이었다.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조각상이 묘사한 생물, 난폭하고 혐오스러운 형체를 지닌 그 무언가가 나무와 뼈로 만들어진 고대의 제단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윽고 쉐이드가 뒤쪽에서 다가왔다.
6장
"가슴팍에 꽂힌 검을 뽑아다오." 쉐이드가 내 마음 속으로 자신의 생각과 심상을 투영했다. "검을 뽑아서 날 자유롭게 해주오." 쉐이드의 부탁을 들어주려던 바로 그 순간, 거대한 공포가 날 감쌌고 처음으로 의구심이란 감정이 생겨났다. 방금 말을 걸어온 게 저 괴물이면 어떡하지? 그대로 멈춰선 나는 쉐이드에게 질문을 하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하여, 두려움을 억누르고 그 부탁을 거절했다.

그러자 자그마한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쉐이드는 분노를 쏟아냈다. 격노한 상태로 붉게 타오를 정도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의사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누군가를 죽이고 상처 입혀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와, 이내 내 정신을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내가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하는 모습이 말이다.

두려움에 질려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서 빠져나와 어둠이 내리깔린 숲을 내달리면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 존재를 맹신했던 자신을 욕했다. 결국에는 자포자기해서 버려진 여우굴 속에 몸을 숨기게 되었고 말이다. 여전히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쉐이드는 날 찾아헤매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땅굴에 몸을 숨긴 나는 두려움과 역겨움에 파르르 떨며 숨죽여서 울어야 했다. 다시 한 번 잠에 빠져들어서 연구실로 돌아온 그 순간까지 말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는 한밤중에 길거리를 내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방으로 뛰어들어서 잠에서 깬 딸아이를 힘껏 안아주었다. 아마 고개를 내저으며 눈물을 흘렸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는 널 해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되뇌이면서 말이다.
7장
여우굴 속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낸지도, 쉐이드가 본모습을 드러낸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두려움이란 덩굴이 내 살점을 더 강하게 옭아매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 서재에 틀어박혀서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서적들을 읽어내린다. 내가 도망쳤던 괴물로부터 가족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비술에 관련된 지식을 찾으면서 말이다.

사실 희망을 거의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쉐이드나 "꿈의 세계'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오늘 아침, 존경해 마지 않는 학자인 에라미어로부터 소포가 당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보내준 양피지와 서적을 탐독한 끝에 나는 쓸만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부패의 감시자는 먼 과거에 우리의 세계에도 존재했으며, 나는 그들이 남긴 유물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남긴 역사의 진실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지금에도 스스로가 망설이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기록관이니, 그 사실 또한 남기는 게 옳지 않겠는가.
8장
부패의 감시자들은 쉐이드를 엘더라고 불렀다. 자신을 인식하지조차 못했던 때에 망각 속에서 태어난, 악의에 찬 광기에 사로잡힌 존재라면서 말이다. 본래는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지만, 엘더는 어느 순간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는 우리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었다. 녀석은 사냥터로 쓸... 혼돈에 가득 찬 은밀한 세계를 유리 구슬처럼 빚어냈다. 내가 찾아갔던 꿈의 세계가 바로 그 "유리 구슬"이었으리라.

엘더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 세계로 왔다. 싱싱한 먹잇감을 좋아했기에, 꿈 속에서만 나타나는 귀신이 되어서 아이들을 강제로 데려가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녀석은 그림자의 왕국으로 끌어들인 아이들이 꾸는 악몽 속에서 연회를 펼쳤는데, 그들의 상상력은 엘더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렇게 살아가던 엘더는 무언가를 성취해내려 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야 할... 진짜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녀석은 시공간을 초월한 망각이자 부패라는 자신의 본모습을 깨달았다.

맙소사... 이렇게 글을 써내리는 순간에도, 손이 계속해서 떨려온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녀석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부패의 감시자가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엘더에게 별의 탄생이라는 검을 꽂아넣어서 고통의 왕국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하여,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게 만드는 무기라니... 엘더는 먹잇감으로 삼았던 아이들이 만들어낸 악몽의 잔재 속에 갇혀 있다. 지독한 쇠사슬에 붙들린 채로 굶주린 채로 사냥에 나서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엘더가 남긴 육체는 돌 속에 갇힌 상태지만 그 영혼만큼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내가 마주쳤던 것도 그 영혼이겠지. 다른 사람이 꿈의 세계로 가서 그 쉐이드와 마주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사람이 베나리우스라면... 엘더는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금 갈망이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엘더가 자유를 되찾기 전에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9장
마지막으로 기록을 남긴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엘더를 끝장낼 방법을 찾는 데 쓰고 있지만, 아직 성과는 없다.

비밀 연구실에서 나만의 장치를 만들고 있다. 부패의 감시자가 남긴 지도 장치는, 엘더가 만들어낸 조그만 세상에 들어가거나 그 세상을 봉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다른 기능을 발휘하는 장치를 만들고자 한다.

장치를 손보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렸다. 이것만 완성된다면 엘더가 이 세상을 넘보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도 잠재울 수 없는 녀석이더라도... 추방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10장
어찌 이리도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인가? 악몽에 눈이 먼 나머지, 기록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잊고 있었다. 지도 장치의 수리가 워낙 지지부진했으니 고위 템플러가 의구심을 가질만도 했다.

장치가 완성되기 직전이었던 정오 무렵, 분노에 찬 고위 템플러와 호위대가 찾아왔다. 작업의 진행이 부진한 이유를 말하라며 내 작품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조사했던 자료를 대부분 파기해버렸다. 그대로 수갑을 차게 된 나는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테오폴리스 감옥에 수감되었다.

템플러 경비대에서 근무하는 친구 덕분에, 그나마 기록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단 사실을 아는지라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뭐든지 끄적일 만한 공책을 몰래 들여놓았다고 했다.

베나리우스가 날 어떻게 처분할지 모르겠다. 조리돌림과 채찍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게 없다. 엘더가 우리를 찾아온다는 사실만이... 우리 모두를 덮치리라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녀석은 고위 템플러든 카루이 노예든 상관하지 않고 문을 두드려댈 것이다. 부패를 퍼뜨리기 위해서... 어떻게든 이 감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리아스에 닥친 불경스러운 사태를 타개할 사람은 나뿐이다...
11장
딸아이가... 내 딸아이가... 세상에... 지난번에 기록을 남긴 이후 정말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끔찍한 참사가 아닐 수 없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겨야겠다.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당장은 안전할 테니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 재앙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릴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을 품은 채로 말이다.

베나리우스, 그 개자식이... 자신의 무기를 제대로 복원하지 않아서 화가 났는지, 날 길거리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는 "이자가 나를 배신했다!"라고 외치며, 부하들에게 망토를 벗기고 몽둥이로 두들겨패란 명령을 내렸다. 초주검 상태가 되자 날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자신을 실망시킨 이유를 물어보았다. 나는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았다.

고귀하고도 성숙한 본모습을 되찾고, 템플러를 따르는 군대로 하여금 날 지원케 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함께라면 엘더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베나리우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딸아이에게 칼을 겨누고서는... 자신을 꿈의 세계로 데려가서 엘더를 만나게 해달라고 협박했다.

이 기록을 읽을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날 탓하지 말았으면 한다. 딸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달리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베나리우스의 명령에 따랐다. 지도 장치를 사용해서,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지나쳐 다시 한 번 아틀라스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12장
예전에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산들바람이 초원을 가로질렀고, 햇빛이 목 언저리를 따스하게 감싸줬다. 고위 템플러와 부하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딸아이는 두려움에 질려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뼛속까지 한기를 느꼈다.

황무지를 따라 나아가자,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쉐이드와 대면할 수 있었다. 엘더는 침묵을 지킨 채로 우리 앞에 나섰다. 녀석의 시선이 날 훑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꿈의 세계로 돌아온 이유를 묻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선 베나리우스가 유령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허공에 이런 말을 내뱉었다.

"그대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들었소." 베나리우스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열쇠를 찾는 중이라고 이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학자가 그러더이다."

베나리우스의 말에 쉐이드는 침묵을 지키며 뭔가 거만한 자세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라면 그 열쇠가 될 수 있지 않겠소?"

시간이 지나감에도 쉐이드는 말을 아꼈다. 생각을 정리할 만큼의 비틀린 침묵이 우리에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고대의 존재가 마음 속으로 심상을 전했다. 베나리우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고위 템플러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달리 뭐가 있겠소? 당연히 힘이지."
13장
거대한 불길이 되어서 일렁거리던 쉐이드는 앞쪽에 있던 숲속으로 곧장 날아갔다. 고위 템플러는 녀석을 쫓아갔고, 그의 부하들은 나와 딸아이를 끌고서 뒤를 따랐다. 그러면 그렇지. 전과 마찬가지로 어두침침한 숲과 끔찍하기 짝이 없는 동굴이 나타났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우리는 조잡한 제단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불경한 조각 아래에 서게 되었다.

"가슴팍에 꽂힌 검을 뽑아 주시오."

엘더가 말하자 자만심에 사로잡힌 고위 템플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검을 거머쥐고 그대로 잡아당겼다. 곧 엄청난 지진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육체와 영혼이 다시 결합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지조차 몸을 들썩이는 것처럼 보였다.

차가운 돌 틈에서 빠져나온 엘더는 우리 앞으로 나섰다. 베나리우스의 떨리는 손에서 쨍그랑거리며 검이 떨어졌다. 검병에서 깜빡이던 하얀 빛무리는 덩굴처럼 뻗어나온 공허의 어둠 속에서 조금씩 사그라들다가 자취를 감췄다.

엘더가 짓는 표정을 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대로 몸을 돌린 나는 딸아이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엘더가 템플러와 그의 부하들 앞에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광기에 잡아먹혀 질러대는 비명이 귓가로 들려왔다. 엘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는 심상을 내보일 필요가 없었다. 녀석은 자유를 되찾았다. 인간 따위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넘쳐흐르던 생명력이 빠져나가자, 고위 템플러와 부하들의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나와 딸아이의 생명력 역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천 년에 걸친 제약으로 굶주렸던 엘더가 만찬을 즐기는 사이, 나는 베나리우스가 떨어트린 지도 장치를 챙겼다. 그리고는 딸아이와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14장
이대로 끝이 날까 두렵다. 나만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다. 고대의 존재가 풀려났다. 나와 딸아이를 잡아먹는 것도 시간 문제겠지. 그 뒤에는 현실 세계에 남겨진 이들이 먹잇감이 되리라.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닥치게 될 것이다. 부패의 감시자가 만들어졌던 그때처럼 말이다. 잠에 빠져든 아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부모들은 흐느끼겠지. 어둠이 내려앉으면, 학살극 속에서 태어난 쇠락이 우리 차원에 머무를 수 있는 육체를 찾으려고 할 것이고. 부패야말로 고대의 존재가 섬기는 주인이니까. 곰팡이 같은 흉물이 덩굴손을 사방으로 뻗치는 상황이 닥칠 것이다. 시공간이란 개념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괴물이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숲을 따라서 내달리는 동안 나는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난 이미 늦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무언가를 형성하는 능력이 있지 않던가. 이걸로 녀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희망을 품었다. 녀석은 만찬을 만끽하느라 우리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싶었다. 이제껏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던 우리는 집으로 향하는 포탈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렁거리는 포탈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오리아스로 돌아왔다.

지체할 시간도 없이, 나는 근처에 있던 도구를 닥치는 대로 포탈 너머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연구실 바닥에 자리 잡은 지도 장치가 불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뱉어냈다. 엘더를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딸아이를 남겨두는 게 우선이겠지. 옷장이나 작업대 밑에 딸아이를 숨겨두고... 깜빡이며 일렁거리는 포탈을 통과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꿈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15장
사랑하는 자나에게,

괜찮은 거지? 아버지라면 응당 그렇듯이 네가 무사히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빌어본다. 착하고 강인하게 자라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기도 빌어보마. 다시는 너와 만날 수 없단 사실이 후회될 뿐이란다. 하지만 어둠 속의 악으로부터 너를 지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구나.

엘더를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단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더구나. 너무나도 강력한 데다, 형성하는 능력조차 나보다 숙달된 존재였으니. 연구실에서 체포당하던 그 날에 베나리우스가 내 발명품을 망가뜨리지만 않았어도, 공허의 틈새를 열어 녀석의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현실 세계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장치를 다시 만들어낼 여유가 되지 않는다. 엘더에게 먹히느라 그걸 다시 만들 방법조차 잊어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뿐, 녀석과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물린 짐승처럼 죽는 순간까지 맞서 보려고 한다. 잠에 빠져들어 오리아스에서 깨어나려고도 시도를 해봤단다. 너를 다시 한번 품에 안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잠에 들 수가 없더구나.

네가 이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리란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써 내려간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무너지려 하는 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이 무한한 어둠 속에서나마 네가 무사하길 빌어보마. 너는 정말 대견한 딸이었단다. 너를 딸이라 부를 수 있는 하루하루가 축복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계속 움직여야겠구나. 계속 맞서 싸워야 하니 말이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정말로 사랑한다.

못난 아빠, 발도 캐사리우스
16장